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뤼첸 전투 (1632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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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뤼첸 전투는 1632년 11월 16일(신력), 30년 전쟁 중 스웨덴과 신성 로마 제국 황제군 간에 벌어진 전투이다. 레흐강 전투에서 틸리 백작이 전사하자 발렌슈타인이 황제군 사령관으로 복귀했고, 스웨덴의 구스타브 2세 아돌프는 작센을 구원하기 위해 뤼첸으로 진격했다. 전투는 안개 속에서 시작되어 구스타브 2세 아돌프의 전사로 혼란에 빠졌지만, 스웨덴군은 승리하여 발렌슈타인을 후퇴시켰다. 그러나 스웨덴군은 구스타브 2세 아돌프의 사망으로 큰 손실을 입었고, 이후 뇌르틀링겐 전투에서 패배하며 30년 전쟁의 주도권을 잃었다. 뤼첸 전투는 스웨덴의 강대국 시대를 확립하는 데 중요한 영향을 미쳤으며, 이후 프랑스의 참전을 이끌어 30년 전쟁의 새로운 국면을 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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뤼첸 전투 (1632년) - [전쟁]에 관한 문서
위치 정보
뤼첸 전투에서 사망한 스웨덴 국왕 구스타프 2세 아돌프 (칼 발봄 작)
"뤼첸 전투에서 구스타프 2세 아돌프의 죽음" (1855) 칼 발봄 그림
전투 정보
전투 이름뤼첸 전투
일부30년 전쟁
날짜1632년 11월 16일 (신력), 1632년 11월 6일 (구력)
장소독일 작센안할트주 뤼첸 북동쪽
결과스웨덴의 승리
교전 세력
교전국 1신성 로마 제국
가톨릭 연맹 (독일)
교전국 2스웨덴
작센
헤센카셀
지휘관
교전국 1 지휘관알브레히트 폰 발렌슈타인
그라프 추 파펜하임
하인리히 홀크
교전국 2 지휘관구스타브 2세 아돌프
베른하르트 폰 작센바이마르
도도 추 크니파우젠
병력 규모
교전국 1 병력총 19,175명
대포 43문
교전국 2 병력총 18,738명 (보병 12,828명, 기병 5,910명)
대포 60문
사상자 규모
교전국 1 사상자사망, 부상, 포로 5,160명
대포 24문 노획
교전국 2 사상자사망 또는 부상 6,000명
추가 정보
전투 연관 캠페인30년 전쟁

2. 배경

30년 전쟁 당시 구스타브 2세 아돌프가 이끄는 스웨덴군은 레흐강 전투에서 황제군 장군 틸리 백작 요한 체르클라에스를 전사시키고 을 압박했다. 이에 신성 로마 제국 황제 페르디난트 2세는 해임했던 알브레히트 폰 발렌슈타인을 다시 기용했다. 발렌슈타인은 단기간에 4만 명이 넘는 용병을 모아 황제군을 재정비했다. 스웨덴군을 주축으로 한 개신교 군은 뉘른베르크에서 황제군과 결전을 벌이려 했으나, 발렌슈타인이 구축한 진지 때문에 교착 상태에 빠졌다. 개신교 군은 여러 차례 공격을 시도했지만 성과를 거두지 못하고, 식량 부족으로 철수해야 했다. ()[1]

이는 스웨덴 참전 이후 연승을 거듭하던 개신교 군의 첫 패배였다. 군사적 피해는 크지 않았지만, 독일 제후들이 황제군 지지로 돌아서는 등 정치적 타격이 컸다. 발렌슈타인은 이 기회를 틈타 작센으로 진군했다. 작센 선제후 요한 게오르크 1세는 구스타브 2세 아돌프의 세력 확장을 경계하여 황제와의 강화를 고려하고 있었기에, 작센 공격은 프로테스탄트 진영의 유력 세력을 이탈시킬 수 있는 기회였다.[1]

황제군의 작센 침공에 구스타브 2세 아돌프는 구원군을 이끌고 나움부르크에 주둔했다. 라이프치히에 본영을 둔 발렌슈타인은 겨울을 나기 위해 프로테스탄트군이 나움부르크에서 겨울 진지 건설에 들어간 것을 보고, 구스타브 2세 아돌프가 봄까지 움직이지 않을 것이라 판단했다. 그는 파펜하임을 보내 개신교 측 모리츠베르크를 공격하게 하고, 자신은 남은 군대를 이끌고 11월 14일 뤼첸으로 이동했다.[1]

그러나 황제군의 병력 분산을 파악한 구스타브 2세 아돌프는 결전을 위해 은밀히 강행군하여 뤼첸으로 향했다. 스웨덴군의 접근을 알게 된 발렌슈타인은 급히 파펜하임을 호출하고, 뤼첸에 방어 진지를 구축했다.[1]

11월 15일 밤, 프로테스탄트군은 뤼첸에 도착했다. 구스타브 2세 아돌프는 강행군으로 지친 부대로 공격하는 대신, 파펜하임의 원군을 경계하며 황제군과 평행하게 진지를 구축했다. 같은 날 밤, 발렌슈타인의 전갈을 받은 파펜하임은 기병대를 이끌고 본대와 합류하기 위해 돌아갔다.[1]

2. 1. 스웨덴의 참전

구스타브 2세 아돌프가 이끄는 스웨덴군은 레흐강 전투에서 황제군 장군 틸리 백작 요한 체르클라에스를 전사시키고 을 압박했다. 이에 신성 로마 제국 황제 페르디난트 2세는 해임했던 발렌슈타인을 다시 기용했다. 발렌슈타인은 단기간에 4만 명이 넘는 용병을 모아 황제군을 재정비했다. 스웨덴군을 주축으로 한 개신교 군은 뉘른베르크에서 황제군과 결전을 벌이려 했으나, 발렌슈타인이 구축한 진지 때문에 교착 상태에 빠졌다. 개신교 군은 여러 차례 공격을 시도했지만 성과를 거두지 못하고, 식량 부족으로 철수해야 했다.[1]

이는 스웨덴 참전 이후 연승을 거듭하던 개신교 군의 첫 패배였다. 군사적 피해는 크지 않았지만, 독일 제후들이 황제군 지지로 돌아서는 등 정치적 타격이 컸다. 발렌슈타인은 이 기회를 틈타 작센으로 진군했다. 작센 선제후 요한 게오르크 1세는 구스타브 2세 아돌프의 세력 확장을 경계하여 황제와의 강화를 고려하고 있었기에, 작센 공격은 프로테스탄트 진영의 유력 세력을 이탈시킬 수 있는 기회였다.[1]

황제군의 작센 침공에 구스타브 2세 아돌프는 구원군을 이끌고 나움부르크에 주둔했다. 라이프치히에 본영을 둔 발렌슈타인은 겨울을 나기 위해 프로테스탄트군이 나움부르크에서 겨울 진지 건설에 들어간 것을 보고, 구스타브 2세 아돌프가 봄까지 움직이지 않을 것이라 판단했다. 그는 고트프리트 하인리히 그라프 추 파펜하임을 보내 개신교 측 모리츠베르크를 공격하게 하고, 자신은 남은 군대를 이끌고 11월 14일 뤼첸으로 이동했다.[1]

그러나 황제군의 병력 분산을 파악한 구스타브 2세 아돌프는 결전을 위해 은밀히 강행군하여 뤼첸으로 향했다. 스웨덴군의 접근을 알게 된 발렌슈타인은 급히 파펜하임을 호출하고, 뤼첸에 방어 진지를 구축했다.[1]

11월 15일 밤, 프로테스탄트군은 뤼첸에 도착했다. 구스타브 2세 아돌프는 강행군으로 지친 부대로 공격하는 대신, 파펜하임의 원군을 경계하며 황제군과 평행하게 진지를 구축했다. 같은 날 밤, 발렌슈타인의 전갈을 받은 파펜하임은 기병대를 이끌고 본대와 합류하기 위해 돌아갔다.[1]

30년 전쟁에서 스웨덴의 개입은 1630년 6월 구스타브 2세 아돌프 휘하 1만 8천 명의 병력이 포메라니아 공국에 상륙하면서 시작되었다. 베어발데 조약에 따른 프랑스의 지원금과 작센 선제후국 및 브란덴부르크프로이센의 지원을 받은 그는 1631년 9월 브라이텐펠트 전투와 1632년 4월 레흐 강 전투에서 제국군을 격파했다. 그러나 이로 인해 그는 남부 독일 깊숙이 진입하게 되었고, 제국군 총사령관 알브레히트 폰 발렌슈타인은 퓌르트에 주둔하며 북쪽으로 향하는 그의 통신선을 차단할 위협을 가했다. 9월 3일, 마을 외곽 제국군 진영에 대한 알테 페스테 전투는 격퇴되었는데, 이는 구스타브가 독일 원정 중 저지른 가장 큰 실책으로 여겨진다.

이 승리 후, 발렌슈타인은 하인리히 홀크와 합류하여 작센을 공격, 요한 게오르그 1세 선제후를 전쟁에서 탈퇴시키고 구스타브가 그를 추격하도록 강요하려 했다. 11월 초 라이프치히가 함락되었고, 14일 발렌슈타인은 그곳에 동계 주둔지를 설치하기로 결정했다. 그러나 다음 날 스웨덴군은 고트프리트 하인리히 그라프 추 파펜하임의 5,800명의 군단이 할레로 파견되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고, 이로 인해 발렌슈타인은 1만 3천 명에서 1만 5천 명의 병력만 남게 되었다. 이로써 구스타브와 그의 1만 9천 명의 병력은 수적으로 우세해졌고, 그는 나움부르크 기지를 출발하여 공격하기로 결정했다. 스웨덴군 외에도 그의 병력에는 헤세-카셀 출신 850명과 작센 선제후국 출신 약 2,000명이 포함되었지만, 그들의 주력군은 없었다.

11월 15일 저녁, 스웨덴/독일 연합군은 뤼첸 외곽 2km 지점에 전투 대형으로 진을 치고 다음 날 공격할 준비를 했다. 정찰병으로부터 그들의 움직임을 보고받은 발렌슈타인은 파펜하임에게 가능한 한 빨리 돌아올 것을 명령했다. 파펜하임은 11월 6일 자정 직후 기병을 이끌고 출발했고, 보병은 뒤따르도록 했으며, 발렌슈타인의 병력은 밤새도록 뤼첸-라이프치히 도로, 즉 비아 레기아를 따라 방어 진지를 구축했다. 제국군 우익을 제외하고는 지형이 대부분 평평했는데, 발렌슈타인은 세 개의 풍차 옆의 작은 언덕에 주요 포병대를 지원하며 주둔시켰다.

2. 2. 발렌슈타인의 재등장과 전략

레흐강 전투에서 틸리 백작이 전사하자, 신성 로마 제국 황제페르디난트 2세는 알브레히트 폰 발렌슈타인을 황제군 사령관으로 복귀시켰다. 발렌슈타인은 불과 3개월 만에 4만 명이 넘는 대규모 용병을 동원하여 열세였던 황제군을 재건했다. 스웨덴군을 중심으로 한 프로테스탄트군은 뉘른베르크로 진격하여 황제군과 결전을 벌이려 했으나, 발렌슈타인이 야전 진지를 구축하여 맞서 싸웠기 때문에 교착 상태에 빠졌다. 프로테스탄트군은 여러 차례 강습을 시도했으나, 매번 격퇴당해 전과를 올리지 못하고, 식량 부족에도 시달렸기 때문에 후퇴했다.[1]

스웨덴 참전 이후 프로테스탄트군에게는 처음으로 패배였으며, 군사적 손실은 크지 않았지만 정치적 타격은 심각했다. 관망하던 독일 제후들이 황제군 지지로 기울었기 때문이다. 발렌슈타인은 이 승리를 이용하여 작센으로 군대를 향하게 했다. 작센 선제후요한 게오르크 1세는 독일에서 구스타브 2세 아돌프의 세력 확장을 우려하여 황제와의 강화를 생각하고 있었다. 따라서 작센을 공격하면 조기에 강화를 제의할 가능성이 크고, 프로테스탄트 진영에서 유력한 세력을 이탈시킬 수 있다고 발렌슈타인은 생각했다.[1]

황제군의 작센 침공에 대해, 구스타프 아돌프는 구원을 위해 군대를 나움부르크까지 진격시켜 진영을 설치했다. 라이프치히에 본영을 두고 있던 발렌슈타인은 이미 혹한기가 다가오고 있기 때문에 프로테스탄트군은 나움부르크에서 그대로 동계 주둔에 들어가고, 더 이상 군대를 움직이지 않을 것이라고 판단했다. 그래서 발렌슈타인은 파펜하임에게 일군을 주어 몰리츠베르크 공격에 파견하고, 자신은 나머지 군대를 이끌고 라이프치히와 나움부르크를 잇는 도로 중간에 있는 뤼첸으로 이동하여 11월 14일에 그곳에 도착했다.[1]

그러나 황제군의 분할을 감지한 구스타프 아돌프는, 약체인 틈을 타 결전을 강요하기 위해, 발렌슈타인의 허를 찔러 강행군으로 뤼첸으로 향하고 있었다. 프로테스탄트군의 접근을 알게 된 발렌슈타인은 부대를 전개하여 야전 진지를 구축하는 동시에, 즉시 군대를 돌아오도록 파펜하임에게 급사를 파견했다.[1]

11월 15일 밤늦게, 프로테스탄트군은 뤼첸에 도착했다. 황제군이 이미 진지를 구축하고 있는 것을 본 구스타프 아돌프는, 강행군으로 지친 부대가 강습을 하는 어리석음을 피하고, 파펜하임의 증원군에게 협공을 받는 것을 경계하여, 도로를 사이에 두고 황제군과 나란히 진을 치고 대치했다. 같은 날 심야, 발렌슈타인의 소식을 받은 파펜하임은 급히 기병만을 모아 본대와 합류하기 위해 돌아가고 있었다.[1]

2. 3. 양측 군대의 이동과 대치

구스타브 2세 아돌프가 이끄는 스웨덴군과 알브레히트 폰 발렌슈타인이 이끄는 황제군은 나움부르크라이프치히를 거쳐 뤼첸으로 이동하며 대치했다. 레흐강 전투에서 틸리 백작 요한 체르클라에스를 잃은 신성 로마 제국 황제 페르디난트 2세는 발렌슈타인을 다시 기용하여 군대를 재정비했다. 발렌슈타인은 작센을 공격하여 작센 선제후 요한 게오르크 1세를 전쟁에서 이탈시키려 했다.

구스타브 2세 아돌프는 황제군의 작센 침공에 대응하여 군대를 나움부르크까지 진격시켰다. 발렌슈타인은 혹한기가 다가오자 스웨덴군이 움직이지 않을 것이라 판단하고, 파펜하임에게 군대 일부를 주어 다른 곳을 공격하게 하고, 자신은 11월 14일에 뤼첸으로 이동했다. 그러나 구스타브 2세 아돌프는 황제군의 병력 분산을 간파하고 결전을 위해 강행군하여 뤼첸으로 향했다.

11월 15일 밤, 스웨덴군은 뤼첸에 도착했지만, 황제군이 이미 견고한 진지를 구축한 것을 확인했다. 구스타브 2세 아돌프는 강행군으로 피로한 병사들로 즉시 공격하는 대신, 파펜하임의 원군에게 협공당하는 것을 경계하며 황제군과 평행하게 진지를 구축하고 대치했다. 같은 날 밤, 발렌슈타인의 연락을 받은 파펜하임은 기병을 이끌고 본대에 합류하기 위해 급히 돌아왔다.

3. 양측 군대의 포진

양군의 초기 배치도


개신교 진영은 보병을 2열로 배치하고, 그 양익에 기병을 배치했다. 보병대열 전방에는 중포를 배치하고 남은 경포는 부대 사이에 총병 분견대와 함께 배치했다. 구스타프 2세 아돌프는 우익 기병대 지휘를 맡았고, 좌익 기병대는 베른하르트 폰 작센-바이마르, 중앙 보병대는 전열에 닐스 브라에, 후열엔 도도 폰 크니프하우젠이 맡았다. 스웨덴군의 전투대형은 구식 테르시오 진형이 아닌, 중대 여러 개로 구성된 대대와 이 대대를 모아 만든 여단으로 구성되어 횡열이 넓은 것에 비해 종열의 두께는 얇아 분화력과 유연성이 뛰어났다.

황제군 진영은 알브레히트 폰 발렌슈타인이 도로를 따라 참호를 파서 총병을 매복시키고 그 후방에 방진으로 구성된 보병대를 배치한 뒤 기병은 양익에 배치했다. 또한 보병 예비대로 이들을 지원하게 하였다. 우익의 풍차언덕(풍차가 4개 있었다)에 경포 14문을 배치하고, 남은 대포는 보병대 정면에 배치했다. 발렌슈타인은 풍차언덕에서 지휘했고, 좌익 지휘는 헨리히 폰 홀크가 맡았다. 발렌슈타인군도 스웨덴군처럼 보병 횡열을 줄이고, 여단 규모의 전투대형을 만들었다.

3. 1. 프로테스탄트 군 (스웨덴-독일 연합군)

프로테스탄트군은 스웨덴군과 독일 프로테스탄트 제후 연합군으로 구성되었다.

구분병력기타
보병12,800명
기병6,200명
대포60문중포 20문, 경포 40문



프로테스탄트군은 보병 전열을 이중으로 배치하고, 양익에 기병을 배치했다. 보병 전열 전면에 중포를 배치하고, 나머지 경포는 전열의 틈에 소총병 분견대와 함께 배치했다. 총사령관 구스타프 2세 아돌프는 우익에서 기병대를 지휘했고, 좌익 기병대는 베른하르트 폰 작센-바이마르, 중앙 보병 전열은 전열은 닐스 브라에, 후열은 도도 폰 크니프하우젠이 지휘했다. 스웨덴군의 전투 대형은 수개의 중대로 구성된 대대와 여러 대대를 조합한 여단으로 구성되었다. 구식 테르시오에 비해 횡열의 폭에 비해 종열의 깊이는 얇았고, 그만큼 화력과 유연성이 뛰어났다.

3. 2. 신성 로마 제국 황제군

발렌슈타인이 이끄는 황제군은 보병 10,000명, 기병 7,000명, 대포 24문(중포 1문, 경포 23문)으로 구성되었으며, 파펜하임이 지휘하는 2,000~3,000명의 기병 증원군이 있었다.

발렌슈타인은 도로변에 참호를 파서 소총병을 매복시키고 그 후방에 보병 전열을 배치했으며, 기병은 양익에 배치했다. 우익의 풍차 언덕(풍차 4기가 있었다)에 경포 14문을 배치하고, 나머지 대포는 보병 전열 정면에 배치했다.

총사령관 발렌슈타인은 풍차 언덕에서 지휘했고, 좌익은 헨리히 폰 홀크가 지휘했다. 발렌슈타인군도 스웨덴군과 마찬가지로 보병의 횡열을 줄이고 여단 규모의 전투 대형을 취하고 있었다.

4. 전투 경과



1632년 11월 16일, 짙은 안개로 양측 모두 움직이지 못하다가, 오전 11시경 안개가 걷히자 구스타브 2세 아돌프가 공격을 명령하면서 뤼첸 전투가 시작되었다. 프로테스탄트군 중앙 보병은 참호를 돌파하여 황제군 보병을 압박하고 대포를 빼앗았으나, 발렌슈타인이 직접 기병을 이끌고 와 대포를 되찾았다. 프로테스탄트군 좌익은 황제군 포격에 막혔고, 구스타브 2세 아돌프가 이끄는 우익만이 황제군 좌익을 압도했다.

제국군 측에서 본 전투 장면. 제국군 사령관 오타비오 피콜로미니의 의뢰로 제작된 피터르 스나이어르의 그림.


전투 초반, 중앙 공격이 실패했다는 소식을 들은 구스타브 2세 아돌프는 직접 기병대를 이끌고 지원에 나섰으나, 안개와 포연, 그리고 자신의 심한 근시 때문에 소수의 호위병과 함께 적진에 들어가 버렸다. 황제군 기병의 습격으로 팔에 부상을 입고 후퇴하던 중, 등에 총을 맞고 낙마하여 오타비오 피콜로미니 부대 기병에게 머리를 쏘여 전사했다.

구스타브 2세 아돌프의 사망에도 불구하고, 시야가 좋지 않아 양군은 그의 죽음을 바로 알지 못하고 전투를 계속했다. 프로테스탄트군 중앙 보병은 맹공을 가했으나 황제군에 격퇴당했고, 중앙 진지와 대포를 뺏고 빼앗기는 상황이 이어졌다.

오후 2시, 파펜하임의 기병대가 도착해 황제군 좌익을 지원, 프로테스탄트군 우익에 돌격했다. 발렌슈타인은 "저것이 바로 우리의 파펜하임이다!"라고 외쳤다. 파펜하임은 5번 돌격해 프로테스탄트군 공세를 늦추고 황제군 좌익을 회복시켰으나, 프로테스탄트군 우익은 견고했다. 오후 3시, 파펜하임은 5번째 돌격 중 총상을 입고 후송되어 다음날 사망했다.

구스타브 2세 아돌프의 전사 소식이 퍼지자 프로테스탄트군은 혼란에 빠졌으나, 3위 지휘관 크니프하우젠이 전군을 불러모아 붕괴를 막았다. 오후 3시, 2위 지휘관 베른하르트가 지휘권을 잡고, 악셀 옥센셰르나가 보좌하여 전투를 계속했다.

오후 4시, 베른하르트는 구스타브 2세 아돌프의 죽음을 숨긴 채 프로테스탄트군에게 마지막 돌격을 감행하도록 지시했다. 병사들은 왕의 죽음을 알고 원수를 갚기 위해 맹렬히 돌격했다. 황제군도 맞섰으나, 프로테스탄트군이 중앙 진지를 제압하고 대포를 빼앗았다. 좌익, 우익도 밀리자 황제군은 후퇴했다.

오후 6시, 파펜하임군 후속 보병 3,000~4,000명이 도착했으나, 날이 저물어 발렌슈타인은 전투에 투입하지 않았다. 프로테스탄트군도 공격을 중단했다. 다음날 새벽, 발렌슈타인은 파펜하임군 보병에게 후퇴 엄호를 지시하고 라이프치히로 철수했다. 프로테스탄트군은 추격하지 않고 구스타브 2세 아돌프의 시신을 찾았다. 시신은 겹겹이 쌓인 시체 속에서 발견되었고, 셔츠를 제외한 장비는 모두 탈취당한 상태였다. 황색 버프코트는 황제에게 보내졌으나, 제1차 세계 대전 후 스웨덴에 반환되었다.

1632년 11월 16일 양군의 진형. 북쪽이 황제군, 남쪽이 프로테스탄트군.

4. 1. 초기 전투 상황

1632년 11월 16일 이른 아침부터 짙은 안개 때문에 양군은 움직일 수 없었다. 오전 11시경 안개가 걷히자 구스타프 2세 아돌프는 공격을 명령했다. 프로테스탄트군 포병대가 포문을 열자, 프로테스탄트군은 전진을 시작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프로테스탄트군 중앙 보병은 참호를 돌파하여 황제군 보병 전열을 압박하고, 적진에 들어가 대포를 빼앗았다. 발렌슈타인은 직접 기병을 이끌고 지원하여 프로테스탄트군 중앙을 압박해 대포를 되찾았다. 프로테스탄트군 좌익은 풍차 언덕에 있던 황제군 대포의 포격 때문에 제대로 전진하지 못했다. 구스타프 2세 아돌프가 지휘하는 프로테스탄트군 우익은 황제군 좌익을 압도하기 시작했다.

중앙 공격이 실패했다는 보고를 받은 구스타프 2세 아돌프는 직접 기병 부대를 이끌고 중앙 지원에 나섰다. 그러나 전장의 안개와 포연, 그리고 심한 근시 때문에, 구스타프 2세 아돌프는 소수의 호위병들과 함께 적진에 들어갔다. 곧 황제군 기병이 습격하여 구스타프 2세 아돌프는 팔에 부상을 입었다. 호위병들과 후퇴했으나, 황제군 기병의 돌격으로 혼란에 빠져 결국 전사했다. 등에 총탄을 맞고 낙마한 그를 피콜로미니 지휘하의 기병이 머리를 쏘았다고 한다.[1]

하지만, 시야가 좋지 않아 양군 모두 구스타프 2세 아돌프의 죽음을 바로 알지 못하고 전투를 계속했다. 기병 지원을 얻은 프로테스탄트군 중앙 보병은 황제군 중앙에 맹공을 가했으나, 황제군 포병과 보병의 사격, 기병의 돌격에 격퇴되었다. 프로테스탄트군은 이후에도 여러 번 공격을 가해, 중앙에서는 진지와 대포를 뺏고 빼앗기는 상황이 계속되었다.

파펜하임


오후 2시, 파펜하임이 이끄는 기병대가 전장에 도착, 열세에 있던 황제군 좌익을 지원하기 위해 프로테스탄트군 우익을 향해 돌격했다. 이를 본 발렌슈타인은 "저것이 바로 우리의 파펜하임이다!"라고 외쳤다. 파펜하임은 5번에 걸쳐 돌격하여 프로테스탄트군의 공세를 늦추고, 황제군 좌익의 열세를 회복했다. 그러나 프로테스탄트군 우익은 견고하여 격파하지는 못했다. 오후 3시, 5번째 돌격 중 파펜하임은 총탄을 맞고 부상당해 후방으로 보내졌고, 기병 돌격은 중단되었다. 파펜하임은 전투의 상처가 악화되어 다음 날인 17일 사망했다.

그때쯤 구스타프 2세 아돌프의 전사 소식이 전장에 퍼졌다. 프로테스탄트군은 일시적으로 혼란에 빠졌고, 전선 부대는 후퇴하려 했다. 궤주 직전, 서열 3위 지휘관 크니프하우젠이 냉정을 찾아 전군을 불러모아 붕괴를 막았다. 오후 3시, 서열 2위 지휘관 베른하르트는 구스타프 2세 아돌프의 죽음을 알고, 전군의 지휘권 장악을 선언했다. 스웨덴 총리 옥센셰르나도 즉시 베른하르트를 보좌하여 전투를 계속했다.

베른하르트

4. 2. 구스타브 2세 아돌프의 죽음

1632년 11월 16일, 이른 아침부터 짙은 안개가 껴 양군은 움직이지 못했다. 오전 11시경 안개가 걷히자 구스타브 2세 아돌프는 공격을 명령했다. 프로테스탄트군 중앙 보병은 참호를 돌파해 황제군 보병을 압박하고 대포를 빼앗았다. 발렌슈타인은 기병을 이끌고 와 대포를 되찾았다. 프로테스탄트군 좌익은 황제군 대포 포격에 막혔고, 구스타브 2세 아돌프가 이끄는 우익만이 황제군 좌익을 압도했다.

중앙 공격 실패 소식을 들은 구스타브 2세 아돌프는 기병대를 이끌고 지원에 나섰다. 그러나 안개와 포연, 심한 근시 때문에 소수의 호위병과 함께 적진에 들어가 버렸다. 황제군 기병의 습격으로 팔에 부상을 입고 후퇴했으나, 난전 중 등에 총을 맞고 낙마하여 오타비오 피콜로미니 부대 기병에게 머리를 쏘여 전사했다.

시야가 좋지 않아 양군은 구스타브 2세 아돌프의 죽음을 바로 알지 못하고 전투를 계속했다. 프로테스탄트군 중앙 보병은 맹공을 가했으나 황제군에 격퇴당했다. 프로테스탄트군은 계속 공격하여 중앙 진지와 대포를 뺏고 빼앗기는 상황이 이어졌다.

오후 2시, 파펜하임의 기병대가 도착해 황제군 좌익을 지원, 프로테스탄트군 우익에 돌격했다. 발렌슈타인은 "저것이 바로 우리의 파펜하임이다!"라고 외쳤다. 파펜하임은 5번 돌격해 프로테스탄트군 공세를 늦추고 황제군 좌익을 회복시켰으나, 프로테스탄트군 우익은 견고했다. 오후 3시, 파펜하임은 5번째 돌격 중 총상을 입고 후송되어 다음날 사망했다.

구스타브 2세 아돌프의 전사 소식이 퍼지자 프로테스탄트군은 혼란에 빠졌으나, 3위 지휘관 크니프하우젠이 전군을 불러모아 붕괴를 막았다. 오후 3시, 2위 지휘관 베른하르트가 지휘권을 잡고, 악셀 옥센셰르나가 보좌하여 전투를 계속했다.

오후 4시, 프로테스탄트군은 마지막 돌격을 감행했다. 베른하르트는 구스타브 2세 아돌프의 죽음을 숨겼으나, 병사들은 왕의 죽음을 알고 원수를 갚기 위해 맹렬히 돌격했다. 황제군도 맞섰으나, 프로테스탄트군이 중앙 진지를 제압하고 대포를 빼앗았다. 좌익, 우익도 밀리자 황제군은 후퇴했다.

오후 6시, 파펜하임군 후속 보병 3,000~4,000명이 도착했으나, 날이 저물어 발렌슈타인은 전투에 투입하지 않았다. 프로테스탄트군도 공격을 중단했다. 다음날 새벽, 발렌슈타인은 파펜하임군 보병에게 후퇴 엄호를 지시하고 라이프치히로 철수했다. 프로테스탄트군은 추격하지 않고 구스타브 2세 아돌프의 시신을 찾았다. 시신은 겹겹이 쌓인 시체 속에서 발견되었고, 셔츠를 제외한 장비는 모두 탈취당한 상태였다. 황색 버프코트는 황제에게 보내졌으나, 제1차 세계 대전 후 스웨덴에 반환되었다.

4. 3. 파펜하임의 등장과 전투의 전환

1632년 11월 16일 오후 2시, 파펜하임이 이끄는 기병대가 전장에 도착하여 열세에 빠진 황제군 좌익을 지원하기 위해 프로테스탄트군 우익을 향해 돌격했다. 이를 본 발렌슈타인은 "저것이 바로 우리의 파펜하임이다!"라고 외쳤다.[1] 파펜하임은 5차례에 걸쳐 돌격을 감행하여 프로테스탄트군의 공세를 둔화시키고, 황제군 좌익의 열세를 회복시키는 데 성공했다.

그러나 프로테스탄트군 우익은 견고했기에 이들을 격파하는 것까지는 할 수 없었다. 오후 3시, 5번째 돌격중에 파펜하임은 총탄을 맞고 부상을 당해 후방으로 보내졌고, 이로 인해 기병 돌격은 정지되었다.[1] 파펜하임은 전투에서 얻은 부상이 악화되어 다음날인 17일에 사망했다.[1]

4. 4. 프로테스탄트 군의 반격과 황제군의 후퇴



베른하르트는 전투에서 지휘권을 이어받아 프로테스탄트 군의 최종 공세를 이끌었다. 베른하르트는 구스타브 2세 아돌프의 죽음을 전군에 알리지 않았지만, 대부분의 병사들은 왕의 죽음을 이미 알고 있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프로테스탄트군은 구스타브 2세 아돌프의 원수를 갚겠다는 일념으로 맹렬하게 돌격했고, 황제군도 이에 맞섰지만 결국 프로테스탄트군의 기세에 압도되어 중앙 진지를 빼앗기고 모든 대포를 탈취당했다. 좌익과 우익 역시 비슷한 상황이었고, 사기가 떨어진 황제군은 전 전선에서 후퇴했다.[1]

오후 6시, 파펜하임군의 후속 보병 부대 약 3,000~4,000명이 전장에 도착했지만, 이미 날이 저물어 아군과 적군을 구별하기 어려웠기 때문에 발렌슈타인은 이들을 전투에 투입하지 않았다. 프로테스탄트군 역시 비슷한 이유로 공격을 중지했다. 다음 날인 11월 17일 이른 아침, 발렌슈타인은 파펜하임군 보병에게 후퇴를 엄호하도록 지시하고 전군에 라이프치히까지 철수할 것을 명령했다. 황제군이 질서정연하게 철수했기 때문에 프로테스탄트군은 추격하지 못했다.[1]

5. 결과와 영향



뤼첸 전투는 양측 모두에게 큰 영향을 미쳤다. 로마 가톨릭 군대는 개선된 전술을 보였지만, 개신교 군대는 큰 피해를 입었다. 특히 구스타브 2세 아돌프의 죽음은 프로테스탄트 진영에 치명적인 손실이었다.

스웨덴은 악셀 옥센셰르나가 크리스티나 여왕의 섭정을 맡아 하일브론 동맹을 결성하고 프랑스의 지원을 받아 군대를 유지하려 했으나, 뇌르틀링겐 전투에서 패배하며 주도권을 잃었다.

발렌슈타인구스타브 2세 아돌프를 전사시켰지만, 그로 인해 자신의 존재 가치가 낮아져 1634년 페르디난트 2세에게 암살당했다.

뤼첸 전투는 스웨덴에 큰 충격을 주었지만, 구스타브 2세 아돌프의 유산으로 스웨덴은 강대국 시대(발트 제국)를 확립할 수 있었다. 이후 30년 전쟁은 가톨릭 국가인 프랑스가 프로테스탄트 측에 참전하면서 새로운 국면을 맞이했다.

5. 1. 뤼첸 전투의 결과

이 전투에서 양측의 사상자와 행방불명자는 9,000명을 넘었다. 황제군은 전장에 모든 대포를 남긴 채 후퇴했고, 프로테스탄트군은 그것들을 노획했다.

전술적으로 보면, 황제군의 진지를 점령하고 모든 대포를 빼앗고, 더 나아가 후퇴시켰다는 점에서 프로테스탄트군의 승리라고 할 수 있다. 전략적으로 보더라도, 이후 곧 발렌슈타인이 라이프치히에서 후퇴하여 보헤미아로 이동했기 때문에, 작센을 위협으로부터 구했다는 점에서 프로테스탄트군의 승리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그 대가로 프로테스탄트군이 치른 희생은 컸다. 사상자 수를 비교하면, 약 3,000명의 황제군에 비해 프로테스탄트군은 2배인 약 6,000명을 잃었다. 특히 스웨덴군 중앙의 피해가 컸고, 제1열에 배치되었던 청색 연대, 황색 연대는 병력의 3분의 2 이상이 사상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두 부대는 베테랑 용병으로 구성되어 있었고, 스웨덴군의 중핵이었기 때문에, 그 손실은 필연적으로 전력 저하를 초래했다. 또한, 황색 연대의 지휘관이자 보병 제1전열의 지휘관이었던 닐스 브라헤(Nils Brahe)는 이 전투에서 입은 상처로 2주 후 사망했다. 더욱이 11월 29일(신력), 전 보헤미아 왕이자 프팔츠 선제후프리드리히 5세는 구스타프 아돌프의 사망 소식을 듣고 얼마 지나지 않아 혼절하여 페스트로 사망했다.

무엇보다 큰 손실은 구스타프 아돌프의 죽음이었다. 스웨덴뿐만 아니라 프로테스탄트 진영에게도 왕의 죽음은 치명적인 손실이었다. 스웨덴에서는 급히 독일에서 본국으로 귀환한 옥센셸나가 어린 크리스티나를 여왕으로 즉위시키고, 자신은 섭정으로서 그를 보좌했다. 또한, 독일 대책으로 하일브론 동맹을 결성하여 프로테스탄트 진영의 결속을 다지면서, 프랑스에 원조를 요청하여, 구스타프 아돌프 사후의 군대 유지를 위해 노력했다. 군의 지휘는 베른하르트와 구스타프 호른이 맡게 되었다.

그러나 기표를 잃은 군의 사기는 떨어졌고, 황제군에 대해 열세인 것은 부정할 수 없었다. 그 후 뇌르틀링겐 전투에서 패배하면서 스웨덴은 완전히 30년 전쟁의 주도권을 잃었다. 애초에 하일브론 동맹은 스웨덴의 강대화를 바라지 않는 프랑스의 간섭으로 처음부터 위기를 품고 있었다. 열세를 타개하려는 스웨덴의 계획은 프랑스와 작센 공의 접근으로 좌절되었다.

발렌슈타인은 이 전투에서 구스타프 아돌프를 전사시켰지만, 그로 인해 자신의 입지는 어려워졌다. 원래 발렌슈타인이 황제군 사령관에 복귀한 것은 구스타프 아돌프라는 강적에 대항할 수 있는 장군이 그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구스타프 아돌프가 죽은 이상, 발렌슈타인의 존재 가치는 저하될 수밖에 없었다. 최종적으로 발렌슈타인은 페르디난트 2세에 의해 1634년암살되지만, 이 전투에 의한 구스타프 아돌프의 죽음은 그 원인 중 하나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뤼첸 전투는 스웨덴에 큰 충격과 영향을 남겼지만, 전투에서 승리한 것과 구스타프 아돌프가 남긴 유산으로 스웨덴의 대국 시대(발트 제국)를 확립한 것은 중요한 결과였다. 이후 교착 상태에 빠진 30년 전쟁에 가톨릭 국가인 프랑스가 프로테스탄트 측에서 참전하면서, 30년 전쟁은 새로운 국면을 맞이하게 되었다.

5. 2. 30년 전쟁에 미친 영향



뤼첸 전투는 30년 전쟁의 판도를 바꾼 중요한 전투였다. 이 전투에서 개신교 진영은 승리했지만, 그 대가는 매우 컸다. 스웨덴 국왕 구스타브 2세 아돌프가 전사하면서 스웨덴과 프로테스탄트 진영은 큰 타격을 입었다.

구스타브 2세 아돌프의 죽음은 스웨덴 국내외에 큰 영향을 미쳤다. 스웨덴에서는 악셀 옥센셰르나가 어린 크리스티나 여왕을 대신해 섭정을 맡아 국정을 운영했다. 옥센셰르나는 하일브론 동맹을 결성하여 프로테스탄트 진영의 결속을 다지고, 프랑스에 원조를 요청하여 군대를 유지하려 노력했다.[1] 그러나 구스타브를 잃은 군대의 사기는 저하되었고, 뇌르틀링겐 전투에서 패배하면서 스웨덴은 30년 전쟁의 주도권을 잃게 되었다.[1]

한편, 구스타브 2세 아돌프를 전사시킨 발렌슈타인 역시 어려운 상황에 처했다. 구스타브라는 강적이 사라지면서 그의 존재 가치가 낮아졌고, 결국 1634년 페르디난트 2세에 의해 암살당했다.[1]

뤼첸 전투는 스웨덴에 큰 충격을 안겨주었지만, 구스타브 2세 아돌프가 남긴 유산 덕분에 스웨덴은 강대국 시대(발트 제국)를 확립할 수 있었다.[1] 이후 30년 전쟁은 프랑스가 프로테스탄트 진영에 참전하면서 새로운 국면을 맞이하게 되었다.[1]

5. 3. 스웨덴의 강대국 시대



뤼첸 전투는 스웨덴에 큰 충격과 영향을 남겼지만, 전투에서 승리한 것과 구스타브 2세 아돌프가 남긴 유산에 의해 스웨덴의 강대국 시대(발트 제국)를 확립한 것은 중요한 결과였다.[1] 무엇보다 큰 손실은 구스타브 2세 아돌프의 죽음이었다. 스웨덴뿐만 아니라 개신교 진영에게도 왕의 죽음은 치명적인 손실이었다.[1]

스웨덴에서는 급히 독일에서 본국으로 귀환한 악셀 옥센셰르나가 어린 크리스티나를 여왕으로 즉위시키고, 자신은 섭정으로서 그를 보좌했다.[1] 옥센셰르나는 하일브론 동맹을 결성하여 개신교 진영의 결속을 다지는 것과 더불어 프랑스에 원조를 요청하여 구스타브 2세 아돌프 사망 후 군대의 유지에 안간힘을 다했다. 군대의 지휘는 작센-바이마르 공작 베른하르트와 구스타브 호른이 맡게 되었다.[1]

그러나 주군을 잃어버린 군의 사기는 오르지 못하고, 황제군에 대해 열세에 있게 된 것은 부정할 수 없었다. 그 후 뇌르틀링겐 전투에서 패배를 겪으면서 스웨덴은 완전히 30년 전쟁의 주도권을 잃게 되었다.[1]

6. 기타

30년 전쟁 당시 신성 로마 제국에서는 그레고리력을 사용하였으나, 스웨덴독일의 여러 지역에서는 율리우스력을 사용하였다. 그 때문에 뤼첸 전투는 신성 로마 제국 측 기록에서는 11월 16일, 스웨덴 측 기록에서는 11월 6일로 각각 기록되어 있다. 스웨덴은 18세기에 그레고리력을 채용하였으나, 구스타브 2세 아돌푸스가 사망했던 11월 6일은 이미 기념일로서 오랜 전통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현재까지도 16일이 아닌 6일이 그대로 구스타브 2세 아돌푸스의 날로 기념되고 있다.

6. 1. 날짜 표기 문제

30년 전쟁 당시 신성 로마 제국에서는 그레고리력을 사용하였으나, 스웨덴독일의 여러 지역에서는 율리우스력을 사용하였다. 그 때문에 뤼첸 전투는 신성 로마 제국 측 기록에서는 11월 16일, 스웨덴 측 기록에서는 11월 6일로 각각 기록되어 있다. 스웨덴은 18세기에 그레고리력을 채용하였으나, 구스타브 2세 아돌푸스가 사망했던 11월 6일은 이미 기념일로서 오랜 전통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현재까지도 16일이 아닌 6일이 그대로 구스타브 2세 아돌푸스의 날로 기념되고 있다.

6. 2. 역사적 유물과 장소

구스타브 2세 아돌푸스 뤼첸 기념비


전투 다음 날, 구스타브 2세 아돌푸스가 전사한 장소 근처에 스웨덴석(스웨덴어: Schwedenstein)으로 알려진 화강암 바위가 놓였다. 1832년에는 이 돌 위에 철제 캐노피가 세워졌고, 1907년에는 근처에 예배당이 건립되었다. 이 전투는 당시 스웨덴에서 사용 중이던 율리우스력으로는 11월 6일, 그레고리력으로는 11월 16일에 벌어졌다. 스웨덴은 1753년에 그레고리력을 채택했지만, 여전히 매년 11월 6일에 구스타브 2세 아돌푸스의 날을 기념하고 있다.[1]

2011년에는 청색여단으로 알려진 스웨덴 부대가 파펜하임의 기병대에 의해 압도당했다고 알려진 지역에서 47명의 군인 유해가 들어있는 무덤이 발견되었다. 유해 검사 결과 평균 연령은 28세였으며, 치유된 부상 흔적은 그들이 베테랑이었음을 보여준다. 절반 이상이 총격을 받았는데, 이는 당시로서는 이례적으로 높은 수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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